[심리철학] 제2장 행동으로서의 마음 : 행동주의

#1
*
데카르트로부터 유래한 심성에 관한 전통적인 개념에 따르면, 심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주관적이다
심리철학, 하종호역 (철학과현실사,1997) : 53p.

앞서 제1장에서도 제기되었던 질문이지만, 저자는 데카르트의 마음(심적인 것)을 사적이고 주관적인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이해로부터 비트겐슈타인의 상자속의 딱정벌레 비유를 통해 데카르트의 마음 모델이 거짓임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출처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다.(성찰에서는 찾지 못했고, 아마 있다면 철학의 원리나 참고 문헌에 제시된 'passions of the soul'에 있을 것 같다)

데카르트의 마음을 단순히 사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통'이란 정념을 예로 들자면, 이런 '고통'은 사적이고 주관적이여서 '간-주관적'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래와 같은 논증을 이해 못하는 이유는 데카르트의 심성을 저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명 사적이고 주관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의식에 관해서), 그 외의 모든 '사유'의 양태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물며 본유관념을 인정하는 데카르트이지 않던가.

(1)우리는 간-주관적인 심적상태를 갖는다

(2)데카르트의 심성개념은 사적이고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마음이라는 것을 단일한 주체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사적 극장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3)따라서 데카르트의 심성개념은 거짓이다.

(55p)

#2
행동주의는 '행동'을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고 있다. 모든 유의미한 심리적인 표현은 '행동적인 현상'과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들에 의해서만 정의 될 수 있다. 오직 행동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들만이 공적으로 관찰 가능하다.
 
*
위에 서술된 부분이 행동주의의 '핵심'이다. 하지만 심성적인 것, 심적 상태와 '행동' 간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예를 들면 '고통'은 '고통 행동'과 필연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필연적인 관계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적 표현으로서의 한 '고통'에 대해서 여러 다른 유기체 혹은 기계적인 시스템은 서로 다른 결과('행동 방식')를 산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충분히 그렇게 상상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고통'에 대해서 꼭 특정한 하나의 '행동'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퍼트남에 의해 제기된 '다수 실현'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한 심적 속성에 대한 여러 물리적 속성의 가능성이 여기서도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미터기'에 대한 비유는 둘의 관계를 다소 느슨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흄의 인과성, 곧 인접, 유사성 등으로 심신인과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해보인다. 차라리 칸트의 '종합'적 연역과 관계가 있다.

우리의 직관 형식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 외부의 무엇(X)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하지만 꼭 이런 방식만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지는 직관형식은 '우연적'이다. 하지만, 필연적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우리가 외부의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항상, 반드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필연'이고, 이런 것이 꼭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우연'이다. 감이 좋은 사람은 심신의 상관관계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탁월하게 응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제1장과 마찬가지로 이번 장도 '속성' 과 '내용', '상태'라는 존재론적인 용어들이 매우 중요하다. 제1장 요약에서 지적했던 부분은 나중에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 물리주의를 말하는 부분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속성예화이론'을 통해서 이 둘의 차이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제1장에서는 용어의 쓰임이 아무래도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by demiourgos | 2010/11/21 14:24 | philosophy of mind | 트랙백 | 덧글(0)

심리철학 제1부 요약

1.
마음(mind) 혹은 심성(mentality)은 무엇일까? 데카르트는 영혼을 하나의 '심적 실체' 간주하였다.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걸까?('having' a mind)

대부분의 학자들은(김재권교수 포함)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물질적인 심적 실체를 가짐으로써 심성이 있게 된다는 생각은 여러 어려움(mental causation 등)에 봉착하게 되는데, 철학자들이 이런 곤란한 문제를 안고 갈만한 어떠한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2.
위와 같은 데카르트의 마음에 관한 '심적 실체' 관점을 포기한다고 해서, 우리 각자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음의 '속성들'(properties), '사건들'(events), '과정들'(processes)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덧붙이면 '예화한다'(instantiating or exemplifying), '상태들'(states), '사실들'(facts)라는 용어도 구분지어 둘 필요가 있다. 과정(process)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일련의 사건과 상태들이다. 저자는 존재론적으로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면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지만 굉장히 반복적으로 나오는 핵심 용어들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용어'들인지는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하단을 참고하기 바란다.(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3.
심리철학은 심리학이나 인지과학, 또는 신경과학에서 연구하는 '심성'과 심적 속성들에 관한 문제와 어떻게 다를까?
1)심적 사건들이 물리적이거나 신경상의 과정들의 결과로서 발생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우리는 일상적으로 심적 사건들이 물리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믿음과 욕구가 어떻게 미세한 신경세포를 자극하여 '행위'토록 하는가?
신경 생리학적인 실험을 더 많이 하고 이론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은 아닌 것 같다. 이 물음은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나아가, 마음과 심성을 '물리적인 세계 안에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 이 물음이 이 책의 주된 관심사가 될 것이다.

4.
'심신수반'
'반데카르트 원리'
'심신 의존'

이 세 원리가 물리주의의 '필요조건'이 된다. 즉 저 조건 중에 하나라도 부정된다면 물리주의를 부정하는 편에 서는 것이다. 이 앞까지는 요약하기가 곤욕스러울 정도로, 작위적인 작업에 지루하기까지 했으나 이제는 단순히 추려서 받아적는 방식을 버린다.

*
심신수반은 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적 영혼이 '하나'만 존재한다고 할 때, 데카르트주의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를 바탕으로 '수반 원리'와 '비물질적 영혼' 이론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속에 '형상'을 생각해보라. '형상' 자체는 동일한 하나이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질료'가 그 각각의 '개체'를 구분짓는다. 예를 들어, '데미우르'라는 갤러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하나이지만, 다른 인간과 물질적으로 다른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데미우르'라는 '이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데미우르는 하나의 현실태이다. 데카르트가 '영혼' 혹은 '정신'을 말할 때, 이와 다른 것을 말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가 말하는 '정신'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유'와 다름아니며, '사유'라는 하나의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공통된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따라서 데카르트주의자와 '수반원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이론'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속성'개념보다 '상태'개념이 주어져야 할 것 같다. 정신은 '하나'일 수 있지만 특정한 '정신', 즉 '의식'은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신수반'에 '반데카르트 원리'를 추가하게 되면, '심적 기능'의 공허한 작용(물리적, 혹은 '현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작용)을 배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신 의존'과 동일하지는 않다.

'심신수반'
'심신의존'
'환원적 심신관계'(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 세가지는 구분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관계가 '단단해진다'.

5.
심적 현상들에는 감각, 지향적 태도(혹은 상태), 의지, 느낌과 정서 등이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감각', '지향적 상태'로 나눈다.

6.
'심적인 것의 특징'에서 '비공간적인 것으로서의 심성'은 제외하더라도 '인식론적 기준'과 '심성의 기준으로서의 지향성'은 '감각질'과 '지향성'에 묶여 있다. 이 두가지를 포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적절히' 비물질적인 것으로서의 '심적인 것'의 고유한 특징을 선별해내는 것이다.

*
인식론적 기준에서 '직접적 지식'을 논하면서 '심적 사건'에 유일한 특징은 아니며 '물리적 사건'에 대한 지식에도 적용된다고 하는 부분은 적절한 것 같다. 눈 앞에 '빨간 원'이 있을 때, 그것이 빨갛다는 것은 어떤 '증거'(추론)없이도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찔렸을 때, 따가운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걸로써 '직접적 지식'이 심적 사건의 특징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유일한 특징은 아니다라는 점 정도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싶다. 내가 보기에는 '직접적 지식'이란 건 '비물리적인 것', 즉 심성을 논할 때 매우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의식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게 고려해볼만하다. 뒷부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참고>
1. The world is all that is the case.


1.1 The world i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


1.11 The world is determined by the facts, and by their being all the
facts.


1.12 For the totality of facts determines what is the case, and also
whatever is not the case.


1.13 The facts in logical space are the world.


1.2 The world divides into facts.


1.21 Each item can be the case or not the case while everything else
remains the same.


2. What is the case--a fact--is the existence of states of affairs.


2.01 A state of affairs (a state of things) is a combination of objects
(things).


2.011 It is essential to things that they should be possible constituents
of states of affairs.

 

2.012 In logic nothing is accidental: if a thing can occur in a state of
affairs, the possibility of the state of affairs must be written into the
thing itself.


2.0121 It would seem to be a sort of accident, if it turned out that a
situation would fit a thing that could already exist entirely on its own.
If things can occur in states of affairs, this possibility must be in them
from the beginning. (Nothing in the province of logic can be merely
possible. Logic deals with every possibility and all possibilities are its
facts.) Just as we are quite unable to imagine spatial objects outside
space or temporal objects outside time, so too there is no object that we
can imagine excluded from the possibility of combining with others. If I
can imagine objects combined in states of affairs, I cannot imagine them
excluded from the possibility of such combinations.


2.0122 Things are independent in so far as they can occur in all possible
situations, but this form of independence is a form of connexion with
states of affairs, a form of dependence. (It is impossible for words to
appear in two different roles: by themselves, and in propositions.)


2.0123 If I know an object I also know all its possible occurrences in
states of affairs. (Every one of these possibilities must be part of the
nature of the object.) A new possibility cannot be discovered later.


2.01231 If I am to know an object, thought I need not know its external
properties, I must know all its internal properties.


2.0124 If all objects are given, then at the same time all possible states
of affairs are also given.


2.013 Each thing is, as it were, in a space of possible states of affairs.
This space I can imagine empty, but I cannot imagine the thing without the
space.


2.0131 A spatial object must be situated in infinite space. (A spatial
point is an argument-place.) A speck in the visual field, thought it
need not be red, must have some colour: it is, so to speak, surrounded
by colour-space. Notes must have some pitch, objects of the sense of
touch some degree of hardness, and so on.


2.014 Objects contain the possibility of all situations.


2.0141 The possibility of its occurring in states of affairs is the form of
an object.

 

by demiourgos | 2010/11/14 14:08 | philosophy of mind | 트랙백 | 덧글(0)

080101 벽두

아래에 써진 글들을 보자면, 매일 아니 매순간에도 내 생각의 결과물은 달라지고 있다. 발전하고 있다. 어느 순간에 깨우쳐 적어놓긴 하지만 그것은 곧 또 나에 의해 깨어진다. 지금 쓸 깨우침도 필경 언젠가는 변화게 될까? 

오늘 느꼈다. 동양학을 공부하면서, 한 2년되었을까? 이제야 그 얻음이 있게 되는 것 같다.

마음에 비해 말하자면, 몸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다.
나(性)에 비해 말하자면, 맘은 또한 나의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per) 격물할 때에 치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구하면 곧 얻는다는(구즉득지) 그 유일한 求이며, 또 나아가 그 방법과 명을 따라 얻어야 할 求이다. 둘을 겸해 말한 것이다.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을 둘로 나눌 수 있음은, 곧 세상에 대해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음을 말한다. 내게서도 역시 그렇다. 언어에도 그 개념의 본원(소종래)을 이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성학십도 심학도설에 맹자와 공자가 양쪽에 배치된 바를 아는가!


  

by demiourgos | 2008/01/01 13:24 | 트랙백 | 덧글(0)

신에 대하여

아마 인간은 그 태초부터 신을 의심했을 것이다. 아니, 그 씨앗과 함께 태어났을 것이다. 우리는 말한다. 또 행동한다. 신은 없는 것이다. 신은 우리가 요청하는 대상일 뿐이지 그게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무심결 붙잡는 쇠붙이 손잡이를 붙들고 거기 의지하는 것,, 그것과 신을 믿는다는 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신은 요청의 대상인가? 신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인가?

신에 대해서 흔히 처음으로 시도하는 인간,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노력이란 신을 define, 즉 갈라 놓고 분할하며 다시 붙여서 우리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여서 혹자는 신이 따라서 없다라고 결론내리고, 또 다른 혹자는 신이 따라서 있다라고 결론내린다.. 이것을 본 또 다른 자들은 따라서 신은 없다라고 하고, 또 다른 자들은 따라서 신은 있다라고 말한다..

신은 과연 있는가?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들이 신의 헛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들을 이용해 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은 적어도 아무 부질없는 것은 아닐 꺼라 의심치 않는다. 무심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데까지 도달해서 헛된 수고를 하지 않도록 우리의 능력을 살피고 또 그 능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밝히는 것, 그것도 참된 일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흔히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밝히려고 하는 자들이 하는 짓들이 앞서 말한 바와 같아서, 그런 것들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더 신을 이해하는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만약 이해가 가능하다면)신을 이해하는 우리의 노력을 다른 데(치고박고 싸우는데) 허비하게 된다.

우리의 능력을 밝힌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밝히는 것이며 이 일을 통해서 신을 우리의 능력으로 밝힐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나올 것이다.. 어떤가 알고 싶지 않은가? 이전 사람들은 스스로 신을 밝힌다고 떠들어만 됐지, 우리가 가진 능력이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엄밀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한 그 작업을 지금 여기서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에 호소해서 주장을 하려고 한다. 누가 과연 신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는가? 신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또 그것들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가지는가? 나는 이러한 것들의 가능성과 또 이러한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하겠다. 적어도 우리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래, 우리가 가진 능력으론, 아니 더 좁혀서 말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우리가 가진 이성과 감성과 지성, 그리고 상상력의 능력들로는 우리의 신을 증명할 수 없다. 이것들이 우리가 가진 능력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해왔던 능력들에 우리 인간이 가진 전 능력을 포함해서 말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능력이라는 하나의 개념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며, 나는 지금 이 인간의 능력이란 개념을 여타 다른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던, 적어도 칸트가 주장했던 그런 능력의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한없이 축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알고 있는가? 칸트에게서 경험이란 개념 역시, 매우 협소하다는 것을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하나의 개념을 사용하는 데에도 여러가지의 의견이 있는 것은 그 개념 뒤에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는 것도 역설적이게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을 모두 포함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의 능력이 경직되어 있길 원하지 않는가보다. 우리의 능력은 生生之하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여기는가? 그런 무엇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신을 증명하고 싶다고? 보라, 우리의 생각이 저렇게 다양할 수 있는 것을, 그러면서도 이렇게 모여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보이지 않고, 말하지 않지만 서로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렇게 모여서 살아가겠는가? 이것을 그 흔한 일반성으로, 계약적 관계라는 경직된 틀로만 해석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기도 우리에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나이에서 제한된 이성(logos)으로 표현되는 그 말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고, 모른다고 말하는가?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 아이를 사랑한다면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귀 기울이고 보지 못하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너무 뜬 구름잡는다고 생각되는가? 내 말이 그 흔한 논리성의 기본도 갖추지 않고 있다고 여겨지는가?

누구의 논리인진 모르겠지만, 각자의 논리란 말로 내 논리를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 주기 바란다. 뭐 이미 그렇게 판단했다면 할 수 없는 거지만 말이다. 이미 그렇게 판단했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그 논리를 바라봐 주길 바랄 뿐이다.

감성없는 개념이 공허하고, 개념없는 감성(직관)이 맹목적이라고 누구는 말한다. 신없는 감성과 개념은 둘 다 공허하고, 맹목적이다. 개인의 의지에만 호소된 그 행위들이(선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우리에게 무서운 현실을 가져다 주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를 보고서 신의 존재를 논하고 싶은자들, 자신의 논리를 통해서 신의 존재를 논하고 싶은자들.. 좋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어찌하겠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러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그들 스스로 알 수 있겠지..모르니까 그렇게 따지길 원하는 건가?)

적어도 스스로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신은 있다. 나 또한 있다. 내가 있는데 어떻게 신이 없을 수 있는가. 또 내가 없는데 어떻게 신이 있겠는가!

by demiourgos | 2007/11/16 17:47 | 트랙백 | 덧글(0)

쓰레기 예찬

쓰레기 예찬..

나 스스로를 쓰레기라 비난함을 이해해달라. 오늘따라 스스로 현자인 척하는 자들이 부끄러워 궤변가를 자처했던 이들을 따라가보려 한다. 그들만큼의 포스가 부족하기에 건전한(?) 광인인 척해보지만..

쓰레기란 무엇인가? 쓰고 버리는 것이 쓰레기가 아니던가! 껍질을 벗겨 속의 내용물을 쏙 빼먹고 던지는 것, 그것을 일컬어 쓰레기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이 쓰레기란 말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남을 향해 그 말을 사용하고 쓰레기가 아닌 척한다. 이런 자들이 진정한 쓰레기 중의 쓰레기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 나라에선 이런 쓰레기들을 대량(?)생산해낸다. 수능을 위한 일회용 인간을 만들어 놓고, 대학에 들어가면 버려두는 짓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그딴 식의 입지(立志)는 대학 들어가자 자신을 담고 있던 용기와 함께 파묻어 버린다. 애초에 일회용일 뿐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에 유통기한을 붙여두곤, 시키는대로 아니 스스로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스스로 쓰레기임을 인정하는가? 나도 사실은 이 불쌍한(그나마도 이들이 불쌍한 이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는 동정심에서..)쓰레기들과 같은 세상 아래 살고 있었다. 내가 쓰레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부끄러움에 끙끙앓았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쓰레기는 쓰레기인데!

배우면 뭐하는가? 폐기처분할 것들을.. 언젠 관심이 있었던가? 배움을 100이란 숫자에 한정해두고 살아온 것을. 배움을 숫자와 글자에 가둬두고 살아온 것을. 앞으로는 다르겠는가? 살아 남은 자들은 다른 용기에 담겨져 또 남은 삶을 살아갈 것을.. 그게 쓰레기의 운명인 것을 어쩌겠는가?

혹시 자신은 쓰레기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는가? 나를 향해서 쓰레기는 너같은 녀석이지 왜 멀쩡한 사람을 가지고 쓰레기라고 하는가라고 말이다. 그래 좋다. 그 정도의 용기는 가져야 쓰레기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지..

난 쓰레기로 살지 않겠다고, 누구보다 멋지게 잘 살아보겠다고, 너같은 녀석도 나를 보거든 부러워 못 배기게끔 할 거라고! 누구도 나를 우러러볼 것이며, 나를 부러워할 것이라고..

웃기는 소리! 누가 누굴 부러워 하는가! 필경 쓰레기 중에 몇명은 쓰레기 중에서 쓰레기를 우러러보겠지.. 하지만 내 이름, 쓰레기를 그런데 더럽힐 순없지.. 나는 누구도 부러워하지않기에 쓰레기니까. 너의 본능을 속이지 말라고? 어떻게 너가 나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냐고? 왜냐면... 나야 말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니까! 너로 말할 꺼 같음, 현자인 척 떠드는 쓰레기에 불과하니까!

적어도 난 내가 쓰레기임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깡통들이여 스스로 흔들어대라! 스스로 살아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arrange Erasmus's Praise of Folly for 쓰레기)

by demiourgos | 2007/11/16 17:46 | An other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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